직장인들의 점심시간 풍경을 보면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
고작 한 시간 남짓한 휴식 시간,
만 원에서 만 오천 원 사이의 식사 한 끼를 두고 우리는 세상에서 제일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김치찌개냐 돈가스냐,
짜장면이냐 짬뽕이냐.
이 사소한 고민 뒤에는 사실 경제학의 가장 잔인하고도 명쾌한 원리인 기회비용이 숨어 있다.
선택은 공짜가 아니다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기회비용을 어떤 선택으로 인해 포기된 대안들 중 가장 가치가 큰 것이라고 정의한다.
쉽게 말해 내가 돈가스를 선택했다면,
포기한 김치찌개에서 얻을 수 있었던 만족감이 바로 기회비용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 비용을 계산한다.
내가 지불한 돈과 시간보다 더 큰 만족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
즉 본전 생각이 의사결정의 기준이 된다.
이성적인 경제인이라면 당연히 기회비용을 따져야 한다.
그래야 합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이 원리를 너무나도 처절하게 일상 모든 순간에 적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단순히 더 맛있는 것을 고르는 차원을 넘어섰다.
우리는 왜 점심 메뉴 앞에서 실패를 두려워하나
왜 점심 메뉴 하나 고르는 게 이토록 피곤한 일이 되었을까?
도대체 왜 점심 메뉴 하나 고르는 게 이토록 피곤한 일이 되었을까.
이 현상을 파고들면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난다.
우리가 메뉴판 앞에서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맛없는 식사로 배를 채웠을 때 밀려오는 불쾌감과 후회를 감당하기 싫은 것이다.
왜 고작 밥 한 끼의 실패가 그토록 싫은가?
그렇다면 고작 밥 한 끼의 실패가 왜 그토록 싫은가 따져봐야 한다.
그건 바로 한 끼 식사에 들어가는 비용이 너무 커졌기 때문이다.
소위 ‘런치플레이션’이라 불리는 살인적인 물가 상승 탓에,
만 원짜리 한 장으로는 제대로 된 밥을 먹기 힘든 세상이 왔다.
지출이 커지니 기대치도 덩달아 높아진다.
비용이 부담스러운데도 왜 굳이 외식을 하며 계산을 거듭하나?
비용이 부담스러운데도 왜 우리는 외식을 포기하지 못하고 계산을 거듭할까.
우리의 소득이 물가 상승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서 실질적인 구매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월급은 제자리걸음인데 밥값만 오르니,
한 번의 지출이 가계부에 미치는 타격감이 예전과 다르다.
만 원을 허투루 썼다는 죄책감이 드는 것이다.
이런 경제적 압박은 왜 우리를 강박적인 선택으로 내모는가.
사회 전반에 여유가 사라지고 효율성만이 정답인 분위기가 고착화되었기 때문이다.
돈뿐만 아니라 시간도 자원이다.
한정된 점심시간,
한정된 용돈 안에서 최대의 효용을 뽑아내지 못하면 왠지 손해 보는 것 같고 뒤처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장 근본적으로, 왜 밥 먹는 것조차 효율을 따져야 하나?
결국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우리가 현재 ‘생존 모드’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유로운 취향의 탐색이나 소소한 실패를 웃어넘길 수 있는 심리적,
경제적 완충지대가 사라졌다.
인생의 큰 결정부터 오늘의 점심 메뉴까지,
모든 선택이 ‘최적화’되지 않으면 생존 경쟁에서 밀려날지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기회비용이라는 잣대를 들이대게 만든다.
정리하자면,
기회비용을 따지는 것은 현명한 결정을 내리는 법이 맞다.
포기한 것의 가치를 정확히 알아야 내가 선택한 것의 소중함도 알 수 있고,
무모한 욕심을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기회비용에 집착하는 이유는 더 나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당장의 손실을 회피하고 싶다는 방어기제에 가깝다.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우리를 피로하게 만든다.
점심 메뉴를 고르는 그 짧은 순간조차 우리는 경제학자가 되어야 하고,
투자자가 되어야 한다.
실패한 한 끼가 가져다주는 타격이 두려워 안전한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발길을 돌리는 모습은 합리적이라기보다 짠하다.
우리는 기회비용을 따져가며 현명한 소비자가 되었다고 자위하지만,
사실은 실패할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팍팍한 하루를 버티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